소설 / 홍지은 / 그림 윤풍경 / 2019 / 151 x 225 mm / 114 p / ISBN 979-11-963771-6-8
한국 단편 소설 아름다운 맛 <미미>와 그림 이야기 <멸치> 두 편으로 나뉜 글과 그림 II 이다. 주인공은 어릴 적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 여자 엘렌으로, 한때 모델로 나름 명성을 얻었지만 지금은 조명에서 내려온 퇴물 취급을 받는 쓸쓸한 여자이다. 유리 칼날 같은 현실 속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섭식장애-거식증, 강박증-와 난임, 그리고 골다공증뿐. 삶의 허무함에 수면제 과다 복용을 한 그녀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8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은 엘렌, 그녀는 미남 애인을 액세서리로 걸치고 다니는 대형 패션지 편집장으로 제 2의 삶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제일 놀라운 것은 거식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알약 하나로 모든 식사를 해결하는 이곳에서 살과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젊은 작가다운 감각으로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읽기 쉽게, 마치 소설 속 알약과 같은 단순한 문체로 풀어나간다. 이 편의 그림 이야기 <멸치>에서도 식욕을 포함한 인간의 끝 없는 욕심과 '먹다' 라는 행위를 작은 멸치를 통해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책 속으로
…… 죽는다. 죽어가고 있다. 죽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산다. 살아가고 있다.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히 기억한다. 손에 꽉 쥐고 있었던 수면제 한 통과 손바닥에 미련 없이 쏟아부었던 수 많은 알약들. 물 한 컵을 벌컥 들이 마셨다. 찬 물이 식도를 타고 꿀렁꿀렁 내려갔다. 빈 속이었던 탓에 미세함에도 복명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다. 차가운 금속 물방울은 시멘트를 발라 딱딱하게 굳어진 위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알약 덩어리가 액체 주머니에 쌓여 창자에 깊숙하게 박혀버렸다.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를 낭떠러지에 밀어넣은 정신은 그제서야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또각또각 울리는 시곗바늘. 숨소리가 끊어진 14평 아파트의 유일한 생명체였다. 무덤가를 연상시키는 으스스함은 햇빛조차 등을 돌려 버리게 만들었다. 정지와 정전이 지배하는 가운데, 곧 미라가 될 육신을 모실 이 작은 공간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낡은 형광등의 가느다란 실오라기 한 줄에 기대어 연명을 하고 있었다 ……
